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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 Times"일간지에 게재된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의 기고문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을 맞이하며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을 앞두고 역사를 왜곡하고 해방군을 비방하며 전범을 미화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2025년 5월 7일 «The Korea Times» 사이트에 게재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의 글 「나치즘에 대한 승리 80주년: 우크라이나의 관점」이 바로 그러한 예시로, 이는 거짓과 역사 왜곡이 뒤섞인 전형적인 사례이다.

 

의도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사실 중 하나는 1938년 9월 29일의 뮌헨 회담과, 이 회의에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의 수장이 서명한 협정이다.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는 분할되었고, 이후 독립 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하였다.

 

뮌헨 야합은 양보를 대가로 독일의 서진을 막고 동쪽으로 팽창을 유도한 '유화정책'의 정점이었다. 이 정책의 본질은 소련을 약화 또는 파괴하는 것이었다. '유화정책'의 대안으로 소련은 집단안보체제를 주장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방은 이를 방해하거나 무시하였다.

 

히틀러에게 뮌헨은 대대적인 유럽 침공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와 불가침 선언을 체결하여 나치에게 동유럽 침략의 길을 열어주었다. 소련은 사실상 완전한 국제적 고립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17~1920년의 무력 간섭, 경제 봉쇄, 방역선 정책, 군사·외교적 도발, 독일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지원, 뮌헨에서의 배신 등 소련은 서방 세계와의 관계에서 별로 좋은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모스크바는 독일이 폴란드 침공 준비를 완료했다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가 패배할 경우 독일군은 민스크 인근까지 도달하고, 이는 소련에 전략적 위협을 야기하며, 독일의 전격전(Blitzkrieg)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됐을 것이다.

 

8월 23일의 소련-독일 불가침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의 근본원인이 아니었다. 폴란드에 대한 공격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준비되어 왔으며, 소련과의 조약과는 상관없이 히틀러가 1939년 4월에 이미 정해 둔 기한인 ‘9월 1일 이전’에 일어났을 것이었다. 8월 중순에 독일군은 전면 동원되어 침공 준비를 완료했다.

 

소련 지도부에게 이 조약 체결은 예외적 상황에서의 예외적 조치였다. 이 조약으로 소련과 독일이 동맹국이 된 것이 아니었다. 파트너나 친구 사이에서는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소련은 폴란드를 공격하지 않았고, 폴란드 군대와 전투를 벌이지도 않았다. 폴란드 국가체제가 붕괴된 상황에서는 러시아 내전 당시 폴란드에게 빼앗긴 서우크라이나와 서벨라루스 지역의 주민들을 보호했다. 브레스트에서의 ‘공동 열병식’같은 것은 없었다. 전쟁 전에 국경을 평화적으로 서쪽으로 옮기고, 약 2년간의 시간을 번 것은 1941년 독일의 "전격전"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는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소련이 시행한 서부 국경 방어 정책의 최대 수혜자로서 서우크라이나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비난하면서 우크라이나 영토가 크게 확장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참회의 말도 하지 않는다.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전 세계적으로 범죄로 규정된 나치즘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수많은 국가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공산주의와 비교하는 것은 명백히 부적절하다.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침략자와 그에 맞서 싸우며 가장 큰 대가를 치른 민족을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시도가 윤리적으로 얼마나 부적절한 지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소련을 가장 격렬하게 비난했던 이들조차 소련이 포로를 대단히 인도적으로 대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나치 독일은 특히 적군 포로에 대하여 비인간적인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민간인에 대한 정책 역시 정반대였다. 수많은 독일인들이 소련군 도착 이후 식량 공급이 개선되었다고 증언했다. 소련군이 점령지의 민간인을 상대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거짓말은 러시아 혐오와 민족 우월주의를 우민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던 나치 프로파간다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지금도 당시의 기법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명백한 사실 하나를 상기시키자면,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연방 공화국이었다.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비에트 붉은 군대에서 자신의 조국인 소비에트 연방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웠다. 이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그리고 다른 수많은 민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이 다른 군대의 일원으로서 싸우기도 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 중에는 나치 부역자이자 오늘날 키예프 정권에 의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스테판 반데라가 이끈 OUN(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도 있다. 12,000명 이상이 무장친위대 제14보병사단 “갈리치아”에 복무했고, 이들은 소련과 폴란드 민간인을 상대로 한 보복 작전, 유대인 대량 학살에 가담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의 공소장은 우크라이나 제14자원사단이 다른 무장친위대(Waffen-SS) 부대와 마찬가지로 반인도적 범죄를 집단적으로 저질렀다고 명시하고 있다.

 

키예프에서 조직된 제118 보조보안경찰대는 주로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벨라루스의 하틴 마을에서 주민 149명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 참고로, 2014년에는 이들의 이념적 후계자들이 오데사의 노동조합 회관에서 4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으며, 이 잔혹 행위의 가해자들 중 그 누구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보조 경찰 부대는 바비 야르 민간인 대량 학살에도 적극 가담했다. 이곳에서 1941년 9월 29일부터 30일까지 단 이틀에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 등 33,771명이 총살당했다. 나치 점령 기간 전체를 통틀어 바비 야르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이것이 오늘날 네오나치적 원칙과 관행(한 민족의 언어 사용 금지, 민족 혐오 조장)은 장려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으로 규정된 인물은 영웅으로 찬양하는 키예프 정권이 숨기고자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반헌법적 쿠데타 이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출신 군인들은 매년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절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는 대조국전쟁 영웅들의 동상을 철거하고 나치 전범들을 공개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했으며, 전승기를 비롯한 각종 승리의 상징물을 금지하고 그 자리를 네오나치 상징으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허위 정보들도 괴벨스식 프로파간다와 다를 바 없다. 지면이 제한되어 있어 이와 관련한 러시아 측 입장과 허위 정보에 대한 반박 자료는 러시아 외무부 및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정보 채널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우리에게 전승절은 눈물로 맞이하는 명절이다. 이 날은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 치른 끔찍한 희생을 떠올리는 날이다. 반면, 서방의 나치 이념 후계자들에게 이 날은 그 어떤 축하도 없는 눈물의 날이며, 그들은 그들의 조부, 증조부가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라는 공동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끝으로 서울에 주재 중인 CIS 7개국 대사들이 승리 8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언론에 기고한 공동 기고문도 참고하시길 권한다.

 

Photo and text credits to "The Korea Times"